Ⅰ. 서 론

1. 문제제기 및 연구목적

이스라엘의 왕정은 사울에게서부터 시작된다. 본래 이스라엘민족은 왕이 아니라 신인 야훼가 직접통치하는 특이한 민족이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잦은 침략으로 인해 그들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왕을 필요로 느끼고 야훼께 왕을 요구하게 되었고 야훼는 사무엘을 통하여 사울을 왕으로 세운다. 그러나 사울은 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사의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준다. 사울은 사사시대에서 왕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물이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진정한 왕정은 다윗에게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은 왕위에 오른 뒤 이스라엘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고 성공한 왕으로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자식교육은 실패한 왕이었다. 장자인 암논은 이복여동생 다말을 성폭행하였지만 다윗은 그냥 두었다. 그러자 다말의 친 오라비인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해버린다. 그러나 다윗은 또 압살롬을 그냥 둔다. 그러자 압살롬은 다윗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반란을 일으키지만 요압에게 죽고 만다. 성경에서는 최종적으로 넷째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왕위 쟁탈전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윗의 후계자로 왕위계승의 우위권을 가지고 있던 아도니야가 왕이 되지 못하고 왜 솔로몬이 왕이 되었는가? 왜 사독과 나단은 솔로몬을 지원하고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 장관 요압은 아도니야를 지원했는가? 왜 솔로몬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름부음을 받지 않고 기혼 샘으로 갔는가? 솔로몬과 아도니야의 왕위계승 쟁탈전은 누가 무슨 의도로 기록하였는가?

오늘날 많은 학자들이 수용하고 있는 로스트(L. Rost)의 “계승설화”의 주제는 누가 다윗을 계승할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는 것과 다른 계승 후보자들의 죽음, 아도니야의 빗나간 왕위 계승의 시도 등의 극적 사건들을 거쳐 솔로몬의 즉위에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돈튼(T. G. Thornton)에 의하면, 계승설화의 저자가 제기한 질문은 “누가 다윗을 계승하여 왕이 될 것인가”였으며, 이 계승설화는 솔로몬이 통치하던 시대에 쓰인, 일종의 솔로몬 즉위의 정통성을 옹호하기 위해, 즉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솔로몬이 왕이 되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 솔로몬의 궁전 정략가가 썼다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 이 계승설화의 저자는 아도니야와 요압의 죽음이 그들 자신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리려 했다는 것이다.

필자는 왕상 1-2장을 독립적인 자료로 생각하고 이 자료를 기초로 하여 솔로몬의 즉위 배경을 규명해 보려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솔로몬의 왕위계승은 종교적인 측면과 종교적인 측면에서 진보주의 측의 승리함으로 성취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Ⅱ. 종교적 배경

1. 사독의 역할

제사장 가문의 아비아달과 사독, 이 두 제사장은 다윗의 치리기간 자주 함께 등장하게 되며, 그 때마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나란히 열거되고 있다. 이들이 제 각기의 길을 가며 갈라지는 것은 솔로몬과 아도니야가 왕위 계승 투쟁을 벌일 때인데, 아비아달은 아도니야 측에, 사독은 솔로몬 측에 가담한다. 솔로몬이 왕위에 등극하자 아비아달은 그의 제사장직은 파면당하고 그의 고향인 아나돗으로 쫓겨나게 된다(왕상 2:26). 아비아달이 파면된 후 솔로몬의 치리기간동안 사독가문만이 예루살렘의 제사장 직을 독차지하게 된다.

아비아달은 엘리의 후손 가운데 하나인 아히멜렉의 아들이다. 사울이 이 가문이 다윗의 반란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무참히 살해하는데 이 중 아비아달만 유일하게 생존하여 다윗의 측근으로 추종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기고 난 이후부터 새로운 제사장인 사독이 등장하는데, 성경에 기록된 바로는 “제사장사독과 아비아달”이라는 도식 하에 불리게 된다. 성경에서 여러 사람의 이름이 언급될 때에 먼저 나오는 사람의 서열이 더 높다고 봐야한다. 그렇다면 자기 가문이 멸하면서 다윗을 섬긴 아비아달보다 더 높은 서열을 가진 사독은 누구이며 어떻게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는지 우리는 궁금증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다.

역대기에 나타나는 사독의 족보나 구약 성경의 다른 책에 나타나는 사독의 족보는 그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역대기상 24:6절에 의하면 다윗이 나란히 세운 두 제사장은 ‘사독과 아비아달’이 아니라 ‘사독과 아히멜렉’이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문제들 때문에 학자들은 역대기 사가의 족보는 어떤 신학적 의도에 의하여 심하게 수정되었고, 그 역사적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자료로 간주되고 있다. 본래는 사독이 아히둡의 아들이 아닌데 후대에, 역대기 사가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사독을 아론의 후손으로 가입시키는 과정에서 아히둡의 아들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신명기 역사가에 의하면, 사독은 본래 뿌리가 없는, 다윗의 예루살렘 정복과 동시에 등장한 새로운 인물이며, 엘리 가문이 야훼의 형벌로 제사장 직을 박탈당하고 야훼께서 새로이 일으키겠다고 예언하신 대로 때가 되어 새로이 등장한 제사장이 바로 사독이라는 것이다.

이 같은 신명기 역사가의 견해는 후에 솔로몬의 즉위와 동시에 엘리 가문의 후손인 아비아달은 제사장직을 박탈당하고 사독만이 제사장으로 임명 받을 때에 사무엘상 2:34-36절에서 사무엘을 통하여 예고된 그 예언이 성취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독의 뿌리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가설을 제시한 사람은 로울리(Rowley)이다. 로울리에 의하면 사독은 본래 예루살렘의 여부스족 신전에서 종사하던 제사장이었으며, 사독 또는 체덱(צדק)이라는 이름도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예루살렘의 제사장의 애칭으로 구체적인 실례를 고대 살렘의 왕이요 제사장이었던 “멜기체덱”(מלכיצדק)(창 14:18)이나 “아도니체덱”(אדגיצדק)(수 10:1) 등의 이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추측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은 기존의 여부스 주민과 새로운 지배자인 다윗 사이의 부드러운 관계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예루살렘을 점령 했을 때 고대로부터 존재한 신전, 멜기세덱의 성전에 법궤를 안치했고 그곳에서 봉사하던 여부스족 제사장들을 그대로 그 성소의 제사장으로 기용한 것으로 보인다.

다윗과 사독 사이의 모종이 계약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다윗은 어느 정도의 종교혼합주의를 인정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혼합주의는 이스라엘 전통신앙인 야훼종교의 제사장과 새로운 수도의 제사장사이에 갈등을 불가피하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여부스 종교의 배경을 가진 사독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훼종교의 제사장인 아비아달보다 우세한 지위를 차지 한 것을 보이는데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성경에 언급되는 순서나 법궤를 안치한 곳이 예루살렘으로 옮겨 왔기 때문이다.

이방 제사장인 사독이 솔로몬이 왕이 되면서 유일한 제사장으로 남으면서 보수적인 정치 세력이나 종교 지도자들의 원망에 대하여 사독가문 측에서 제사장직을 독점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 같은 사독 옹호론을 제시 한 것이라 추측이 되며, 창세기 14장에 나타나는 멜기세덱과 아브라함의 만남도 이 같은 측면에서 이해된다.

이와 같은 보수주의(야훼주의자)와 진보주의(여부스 종교와 야훼종교의 절충한 자) 사이의 갈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해소 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솔로몬의 대관식 때 솔로몬이 가나안의 풍습을 따라 기혼의 샘에서 기름부음 받는 것이나, 솔로몬의 성전이 가나안 신전의 모습을 본 따서 짓도록 유도한 점을 들 수 있다.

2. 성전반대론과 성전옹호론

나단은 그 출신과 소명이 밝혀 지지 않은 예언자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보통 소명설화를 가지고 그 것을 바탕으로 참예언자 임을 증명하는데 나단은 이 소명설화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단의 출신을 설득력 있게 설명한 사람은 블렌킨솝(J. Blenkinsopp)이다. 나단은 본래 히위족이 살던 기브온 출신 예언자로서 야훼신앙으로 개종한 사람이었다.

나단이 그 유명한 성전 건축에 대한 신탁을 받은 곳도 기브온(삼하 7:14)이고, 당시 가장 큰 신전이 있었던 기브온(왕상 3:4)으로 솔로몬을 안내하여 일천번제를 드리게 한 사람도 나단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기브온은 다윗․솔로몬시대에 군사․종교적으로 중요한 도시였다. 요압과 아브넬의 전쟁이 이곳에서 있었고, 모세 때부터 내려온 야훼의 장막과 번제단이 있었으며 기브온 산당에서 솔로몬은 기브온 산당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기도 하였다.

여호수아와 기브온 사람들 사이에 평화조약을 맺은 이후로 기브온 주민들을 야훼 종교에 동화 되었을 것이고 이스라엘도 기브온의 종교에 영향을 받았다. 아마도 나단은 기브온 출신으로 야훼 신앙에 귀의하면서 동시에 야훼종교를 기브온에 토착화 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인물일 것이다. 나단은 이방 종교인 기브온 종교의 장점을 이스라엘의 야훼 종교에 소개한 인물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성전 건축에 대한 나단의 태도는 찬성이었는데 직접 하나님의 계시를 다윗에게 전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보수주의자들에게 신전을 건축하는 것은 분명히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야훼는 성막과 법궤에 임재해 있기 때문이다. 이 성막은 지파 동맹의 중심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주요도시들을 순회하면서 성막이 위치한 곳에서 여러 지파가 모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계약을 갱신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야훼의 임재는 신전이 아니라 성막이었고 법궤였다.

다윗과 나단의 성전 건축옹호론은 다윗 당시만 하여도 성막 옹호론을 고수하던 보수주의자들에게 막혀 실현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신전은 이방인들의 풍습이었고, 신전은 구조 자체가 가나안의 신화에 바탕을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다윗이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기뻐하시고 장려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그와 같은 성경의 기록은 신명기역사가의 상황에서 즉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경험한 이후에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혼의 고향이고 야훼가 임재하시는 곳으로 생각되는 시대의 상황에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성전 건축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진행된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게 성전을 건축하고자 한 진보주의적인 다윗과 나단은 보수주의자들의 반대에 막혀 건축하지 못하였지만 결국에는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면서 끝내는 진보세력이 이긴 것으로 보인다.

Ⅲ. 정치적 배경

1. 히브리 출신과 이방출신

다윗의 예루살렘으로의 천도는 흔히 정치적인 동기에 의해서 기인 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다윗과 함께 하는 다양한 이방인 출신들을 본래 이방인 도시인 예루살렘에 안주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으로의 정치 본부의 이동에서 초래된 진보주의와 보수주의간의 오랜 대립관계가 누적되어, 결국 아도니야와 솔로몬의 계승 투쟁이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

솔로몬의 정치적 성공을 배후에서 도운 두 사람은 밧세바와 나단이었다. 나단은 앞에서 언급했기 때문에 밧세바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선 그녀의 출신에 대해서는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였다는 점과, 밧수아라는 이름을 가진 가나안 여인 밧수아를 유다가 아둘람에서 만나 아내로 맞은 사실을 보면, 그녀는 가나안 원주민 출신일 것이다.

밧세바의 다윗 궁전에서 영향력을 간접적으로 암시해주는 성구가 있는데 그것은 에스겔이 예루살렘(또는 솔로몬)의 죄악을 꾸짖을 때 “네기 헷 사람이라”(겔 16:3, 45)고 말한다는 점이다. 이 이방여인이었던 밧세바는 순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방인에 대한 냉대를 체험하면서, 함께 이방 출신이었던 사독과 나단과 함께 궁중에서 한 그룹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이 같은 증거는 밧세바와 다윗사위의 은밀한 관계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한편 아도니야의 편에 있었던 요압은 다윗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요압은 다윗의 중요한 결정이나 수행과정에서 다윗의 의견을 반대하거나 불평하였다. 압살롬을 죽인 것이나, 아브넬과 아마샤를 살해함으로 통일에 지장을 준 것이나 다윗의 유언에 요압을 죽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사실은 분명해진다. 다윗과 요압은 우리야를 죽이는 사건에서만 의견의 일치를 보여주는데 그것은 요압이 이방인들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이스라엘 출신이요 보수주의 입장에서 가나안 제도인 왕정세습제를 반대하고 모세 계약사상에 충실하여 다윗의 후계자인 압살롬을 죽이고, 또 모세의 계약사상에 위배되는 인구조사 계획을 반대한 그 요압이 무죄한 이방인 출신 장수인 우리야를 죽이라는 명령은 거절하지 못하고 기꺼이 수행했다는 사실은 이방인 출신과 순수 이스라엘 출신 사이에 누적된 갈등 및 대립이 얼마나 깊었던가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헤브론 출신과 예루살렘출신

다윗의 후계자인 이스라엘의 왕위 계승사건에 대해서 아도니야는 왜 왕이 되지 못했나? 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우리는 이 질문을 헤브론 출신인 아도니야와 예루살렘 출신인 솔로몬의 출신 지역으로 인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연구해 보기로 한다.

분명히 다윗 왕권의 적법한 계승자는 아도니야이다. 그것은 후에 아도니야가 밧세바에게 아비삭을 아내로 달라고 하는 요구를 밧세바는 수락했고, 또 밧세바는 이를 솔로몬에게 요청하였다. 다윗도 아도니야를 계승자로 인정했기 때문에 왕자인 아도니야가 자기를 위하여 병기와 기병과 전배 50명을 예비할 때에 묵인하였던 것 같고, 아도니야의 왕위 계승자다운 인품은 다윗뿐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이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윗이 계승자를 결정하지 않았던 것일까?

헤브론은 본래 보수적 유대인의 고향이다. 도시 자체가 고대로부터 남부의 정치․종교적 중심지였고 다윗이 왕으로 추대된 것도 이 헤브론 사람들의 지원과 협조로 가능했다. 다윗을 헤브론을 기반으로 북이스라엘을 통합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킬 때에도 헤브론 사람들의 예루살렘에 대한 반감을 이용하여 출발했던 것이다. 대개의 유대인들은 차기의 왕권은 이 헤브론 출신의 왕자가 계승 할 것으로 보고 압살롬의 반란에 동조했을 것이며, 예루살렘 출신의 사람들은 예루살렘출신의 왕자가 왕위를 계승하기 바랐을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은 다윗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아도니야를 중심으로 하는 요압-아도니야-아비아달 집단과 솔로몬이 중심이 된 밧세바-솔로몬-나단-사독-브나야의 집단의 왕위 계승에 관한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간 것이다. 결국은 보다 강력한 세력과 정략을 구사할 수 있었던 이방인 출신의 진보세력이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이방인 출신이 많았던 예루살렘의 지원을 얻어 헤브론 출신의 아도니야 세력을 압도하고 예루살렘 태생의 솔로몬을 즉위 시키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Ⅳ. 결 론

우리는 다윗이 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통합시킨 왕 나아가서 이스라엘 12지파를 왕정아래 통합시킨 왕으로 이해하고 화합과 번영의 시대를 이끈 왕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다윗의 시대야 말로 이방인 출신이 끊임없이 밀려와 이방인과 유대인간의 끊임없는 갈등의 시대였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윗은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왕으로 가나안종교의 장점을 흡수하려고 하였고 야훼종교를 더 발전시키려고 한 것임에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진보주의세력과 보수주의세력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 다윗의 과제였다. 그러나 다윗은 그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잘 합치지 못하여 끝내는 헤브론을 바탕으로 한 압살롬의 반란이나, 아도니야를 대표하는 보수주의세력과 솔로몬을 대표로하는 진보주의세력간의 왕권 다툼을 초래하였다. 솔로몬의 등극은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된 보수와 진보의 두 사상의 갈등 속에서 결국 진보의 승리로 성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명기적역사가의 신학에 의하면, 비록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에 왕위 계승권은 아도니야가 가지고 있었지만, 야훼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방향을 바꾸게 하사 개혁과 진보를 추구한 솔로몬(및 그의 집단인 나단과 사독)의 손에 왕권의 계승을 허락하셨던 것이다. “이 왕위는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다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왕을 삼으려 하였는데, 그 왕위가 돌이켜 내 아우(솔로몬)의 것이 되었음은 야훼께로 말미암음이니라.”(왕상 2:15)

Ⅴ. 참고도서

이승호, “솔로몬의 즉위에 미친 사독제사장의 역할.” 호남신학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8.

장영일, “솔로몬의 즉위 배경에 대한 연구.” 『장신논단』5집 장로회신학대학교, 1989

오철훈, “ 나단 신탁 연구 : 삼하 7장 1-17절과 대상 17장 1-15절의 비교 연구” 장로회신학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4

최남영, “ 다윗.솔로몬의 왕위즉위기사에 나타난 갈등구조 연구.” 연세대학교연합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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